저는 가끔 가정교회 사역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가정 교회의 흐름과 목사님들의 글을 보곤 합니다. 그 중에 좋은 글이 있어서 최영기 목사님의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을 때> - 최영기 목사님 글
신앙생활과 교회 사역을 하다보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교회 목사는 목자들에게 목양을 위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위임이고 어디까지가 방치인지 경계선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목자들도 비슷한 갈등을 맛봅니다. VIP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임감과 섬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알지만, 어느 정도로 강하게 권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습니다. 계속 일방적으로 섬겨 주면 영적인 어린이로 머물게 된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삶 공부를 수강하라든가 교회 사역을 하라고 강권하면 압박감을 느껴서 잠수를 타거나 목장을 떠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와 같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럴 때 엉거주춤하게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으면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정체에 빠지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을 때에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쪽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갖 영접한 사람의 경우에는, 압박감을 느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최대한 부드럽게 삶 공부 수강과 주일 예배 참석을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 영혼구원해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쪽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 하다 보면 잠잠히, 묵묵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때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핑계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는, 게으름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어차피 꾸중을 들을 것이면 하나님을 너무 신뢰했다고 꾸중을 들어야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고 꾸중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과업을 시작할 때에도 비슷한 갈등을 맛봅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모하기 때문인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정해진 기간 동안 기도해 보고 그래도 확신이 안서면, 안 하는 쪽 보다는 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무모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초청하고 계신데 불순종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중이 같은 선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에는 손해 보는 쪽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두 교회에서 동시에 담임 목사 초청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셔도 순종하겠다는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일정 기간 기도한 후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리지 않으면, 손해되는 쪽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이 들려주고 계시는 음성을 듣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선택 사이의 갈등은 전도할 때에도 경험합니다. 요즈음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에 섣불리 믿음에 관해 얘기를 꺼내면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상대방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열릴 때까지 섬기기만 할 것인가?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면 저는 거부감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할지라도 복음 전하는 쪽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준비해 놓은 사람인데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오는 갈등은 사회생활에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오른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돌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마태 5:39-42), 사회생활에서 양보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삶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양보하면 상대방을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과 가족에게 파멸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에는 무리한 요구를 거절해야 하고, 불의한 요청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깁니다. 양보할 것인가, 권리 주장을 할 것인가? 이러한 기로에 서게 되면 저는 양보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주님께서 내 대신 싸우시도록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선택만 하면서 사는 삶보다, 실수를 범하더라도 순종하는 삶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을 때> - 최영기 목사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