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제가 잠시 다른 주제의 글들을 썼기에 다소 흐름이 끊기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몇 주전에 가정교회에 대해서 쓰던 글을 다시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개신교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집중했던 가치 중에 소위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어야 한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2:9이지요: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주신 소명인 것입니다.
중세 교회는 이런 개념을 놓쳤고 그로 인해 일반 성도들은 극히 수동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런 개념에다 ‘세상 일은 거룩하지 않고 교회 일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거룩의 개념’이 더해지면서, 중세 교회에서 일반 성도들의 자리는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손과 발을 잃게 된 것이죠. 세상에 대한 거룩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적 가치에 따라 다시금 모든 성도들에게 제사장으로서의 소명 의식을 불러 일으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가치는 종교 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르는 아주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금 요즘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의 ‘참으로 해방된 교회 (Liberating the Church)’에서 여전히 이 시대에 해방이 필요한 영역으로 평신도를 손꼽았습니다. 평신도를 사역자로 해방하는 것이 이 시대 개신 교회에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 한마음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가정교회는 그 소명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넘어서야 할 벽이 보입니다. 저는 요즘 ‘평신도 사역자를 세우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평신도’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목회자는 평신도를 세우려고 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스스로 ‘내가 뭘.. 내가 어떻게’하면서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평신도끼리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더욱 문제로 느껴집니다. 사역자는 주변에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인정해 주고 믿어 줄 때, 한 사람이 사역자로 자라갑니다. 제가 요즘 그렇게 성장하면서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스스로 믿어야 하고, 주변 사람도 믿어줘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성장해가고 그 사랑에서 사역자도 예외는 아닌 것이죠.
얼마 전에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간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금 평신도 중심의 가정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중국 교회가 박해를 받기 시작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은 평신도 리더를 중심으로 각 가정에 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가정교회들이 부흥의 모판이 된 것이죠. 그리고 중국의 부흥을 일으킨 세 명의 사람들이 모두 평신도였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평신도, 각자 그 섬기는 외형만 다를 뿐이지.. 그 섬김의 목적과 소명은 동일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외형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과 소명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최지원 목사 드림